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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 밤이 가장 조용한 이유 - 여행의 끝에서 마음이 먼저 멈추는 순간

by birdi 2025. 12. 26.

밤하늘, 구름사이로 별들이 반짝이고 있다.
여행지에서 찍은 밤하늘

 

더 이상 채우지 않게 되는 밤


여행의 마지막 밤은 이상하게도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는 시간이다. 도착한 첫날에는 밤이 부족해서, 몸이 피곤해도 거리를 더 걷고 싶고 불이 켜진 가게 하나라도 더 보고 싶어진다. 하지만 마지막 밤이 되면 그 욕심이 사라진다. 아직 시간이 남아 있는데도, 굳이 무언가를 더 하지 않는다. 이미 이 도시에서 받을 수 있는 감정은 충분히 받았다는 걸 몸이 먼저 알고 있기 때문이다.
짐은 대부분 정리되어 있고, 내일 입을 옷은 이미 꺼내 놓은 상태다. 캐리어의 지퍼를 끝까지 닫지 않은 채, 괜히 다시 열어본다. 더 넣을 것은 없지만, 이 여행이 정말 끝났다는 사실을 조금이라도 늦추고 싶어서다. 마지막 밤에는 새로운 계획 대신, 그동안 스쳐간 장면들이 천천히 떠오른다. 골목의 냄새, 해 질 무렵의 하늘, 무심하게 지나쳤던 가게 간판까지도 갑자기 또렷해진다.
이 밤이 조용한 이유는 할 일이 없어서가 아니다. 마음이 이미 정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더 이상 채우지 않아도 괜찮다고, 이만하면 충분했다고 스스로에게 말하는 밤. 그래서 마지막 밤은 가장 적게 움직이지만, 가장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여행의 끝은 공항이 아니라, 이렇게 아무것도 하지 않게 되는 밤에서 먼저 시작된다.

 

 

 


도시의 소음보다 마음의 소리가 커질 때


창밖의 소음은 평소와 다르지 않다. 차는 여전히 지나가고, 사람들의 웃음소리도 들린다. 그런데 마지막 밤에는 그 소리들이 한 발짝 멀어진 것처럼 느껴진다. 그 이유는 도시가 조용해진 게 아니라, 내가 이곳의 리듬에서 서서히 빠져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도착했을 때는 이 도시의 일부가 되기 위해 애썼지만, 마지막 밤에는 이미 떠날 사람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바라보게 된다.
낮에는 잘 보이지 않던 것들이 밤이 되면 또렷해진다. 호텔 방의 조명, 창문에 비친 내 모습, 창밖으로 보이는 익숙해진 거리. 그 모든 것들이 더 이상 ‘현재’가 아니라 곧 ‘기억’이 될 준비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마지막 밤에는 도시보다 내 마음이 더 시끄럽다. 내일의 이동 경로, 돌아가서 해야 할 일, 다시 시작될 일상까지 한꺼번에 떠오른다.
이때의 조용함은 외로움과는 다르다. 오히려 아주 담담하다. 이 도시와 나 사이의 관계가 끝나가고 있다는 걸 받아들이는 과정에 가깝다. 마지막 밤은 여행자가 도시에게서 물러나는 시간이다. 그래서 소음은 그대로인데, 마음만 조용해진다. 그 조용함 속에서 나는 이곳을 떠날 준비를 한다.

 

 


조용함 속에서 비로소 남는 것들


마지막 밤에 남는 것은 사진보다 감정이다. 낮 동안 찍어둔 사진들을 다시 보기도 하지만, 그보다 더 선명하게 남는 건 사진으로 담지 못한 순간들이다. 아무 생각 없이 걷던 길, 길을 잘못 들어 우연히 만난 풍경, 그저 창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보낸 시간들. 마지막 밤에는 그런 장면들이 정리되지 않은 채로 마음속에 쌓인다.
이 조용함은 비어 있어서 생기는 것이 아니라, 이미 가득 차 있어서 생기는 조용함이다. 더 이상 새로 넣을 공간이 없어서, 마음이 스스로 닫히는 상태다. 그래서 마지막 밤은 늘 빠르게 지나간다. 특별한 사건이 없었는데도, 이상하게 오래 기억에 남는다. 그 밤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여행 전체가 마음속에서 한 번 더 재생되기 때문이다.
여행에서 가장 시끄러운 날은 도착한 날이고, 가장 조용한 날은 마지막 밤이다. 그 조용함은 여행이 끝났다는 신호가 아니라, 마음이 먼저 작별을 연습하고 있다는 증거다. 그래서 우리는 그 밤을 잊지 못한다. 그 조용함 속에서, 여행은 비로소 한 편의 기억으로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