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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일상으로 - 여행과 일상 사이에 잠시 머무는 시간

by birdi 2025. 12. 27.

일본 교토 기온 거리의 야사카노토와 벚꽃 풍경, 봄 여행 중 촬영한 사진
교토 기온거리

 

아무 일정도 없는데 바쁜 날


여행에서 돌아온 다음 날, 혹은 돌아오기 하루 전의 시간은 이상하다. 분명 일정표에는 아무것도 적혀 있지 않은데, 마음은 괜히 분주하다. 어디로 가야 할지도 모르겠고, 그렇다고 완전히 쉬고 싶은 것도 아니다. 여행지에 있을 때는 하루의 목적이 분명했는데, 이 하루에는 목적이 없다. 그래서 더 애매하다.
캐리어는 아직 거실 한가운데 놓여 있고, 지퍼는 반쯤 열린 상태다. 완전히 풀어도 될 것 같고, 그렇다고 다시 닫기에는 이미 돌아와 있다. 이 애매함은 하루 종일 이어진다. 커피를 마시면서도, 창밖을 보면서도 마음이 어디에도 속하지 않은 느낌이다. 여행은 끝났지만, 일상은 아직 시작되지 않았다.
이 하루는 준비의 날도, 정리의 날도 아니다. 그냥 사이에 끼어 있는 날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날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애매한 하루가 있어야만 여행과 일상이 자연스럽게 분리된다. 아무 일정도 없는데 바쁜 이유는, 마음이 이동 중이기 때문이다.

 

 

 

마음이 아직 돌아오지 못한 상태


이 하루 동안 우리는 자꾸만 여행지를 떠올린다. 사진을 다시 보지도 않았는데, 머릿속에서는 이미 여러 장면이 반복 재생된다. 여행지에서는 사소했던 순간들이 이때 와서 의미를 얻는다. 아무 말 없이 걷던 거리, 괜히 오래 머물렀던 카페, 별다른 이유 없이 좋았던 시간들.
몸은 집에 있지만, 마음은 아직 이동 중이다. 그래서 이 하루는 어딘가 붕 떠 있는 느낌을 준다. 해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부담스럽고, 그렇다고 여행의 설렘을 계속 붙잡고 있자니 현실과 어긋난다. 이 애매함은 불안이 아니라, 전환에 가깝다. 여행의 감정이 일상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생기는 자연스러운 공백이다.
이 하루를 억지로 채우려 하면 더 피곤해진다. 계획을 세워도 잘 지켜지지 않고, 쉰다고 해도 완전히 쉬어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 하루에는 애써 무언가를 하지 않아도 된다. 여행과 일상 사이에서 마음이 스스로 방향을 잡도록 내버려두는 게 가장 잘 보내는 방법이다.

 

 

 

애매한 하루가 지나야 일상이 시작된다


이 애매한 하루가 지나고 나서야, 비로소 일상이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더 이상 여행지에 있는 착각이 들지 않고, 해야 할 일들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그제야 캐리어를 완전히 비우고, 여행에서 가져온 물건들을 제자리에 놓는다.
이 하루는 짧지만 중요한 역할을 한다. 여행의 감정을 그대로 일상으로 가져오지 않게 해주고, 동시에 여행을 너무 급하게 과거로 보내지 않게 해준다. 중간에서 완충 역할을 하는 시간이다. 그래서 이 하루를 건너뛰면, 일상은 갑자기 차갑게 느껴지고 여행의 여운은 오래 남아 버린다.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기 전의 가장 애매한 하루는, 사실 가장 필요했던 하루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괜찮았고, 아무 결정도 내리지 않아도 됐던 시간. 그 하루 덕분에 여행은 기억으로 정리되고, 일상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자리를 얻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