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작별의 순간들

한 번만 만난 사람들 – 첫 번째 여행 감성 에세이

by birdi 2025. 12. 9.

스위스, 체르마트에 있는 레스토랑이다. 주방장이 화덕에 양고기를 조리중이다.
스위스, 체르마트의 레스토랑

 

 

나를 스쳐 지나간 사람들의 얼굴, 오래 남는 순간들


여행이라는 건 참 묘하다. 평소라면 절대 스칠 일 없는 사람들과 같은 거리를 걷고, 같은 공기를 마시며, 같은 도시의 풍경을 바라본다. 하지만 그들은 내 인생에서 단 한 번 등장했다가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인연이다. 그럼에도 이상하게, 그런 일회성의 장면들은 오래도록 기억 속에 남는다. 이름도 모르고, 어느 나라 사람인지도 모르고, 다시 만날 가능성조차 없는데도 그 순간만은 이상하게 선명하다.

공항에서 캐리어를 끌고 가다가 서로 길을 비켜주며 건넸던 미소 하나가 이상하게 오래 남을 때가 있다. 그 미소는 그 도시가 나에게 건네는 첫 인사 같았다. 호텔 엘리베이터 앞에서 잠시 스쳐 지나간 여행객의 향기, 표정, 말투. 그 짧은 장면이 그 도시의 분위기를 대변해주는 순간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마트에서 줄이 길게 늘어서 모두 지쳐 있던 때, 앞사람이 조용히 장바구니를 양보해준 장면도 오래 기억에 남는다. 낯선 도시에서 만난 작은 친절은 생각보다 크게 다가온다.

파리의 어느 빵집에서는 진열대를 바라보며 무엇을 고를지 망설이고 있을 때, 옆에 있던 현지 여자가 내가 보고 있던 빵을 살짝 미소 지으며 추천해준 적이 있었다. 아마 그녀는 그 일을 몇 초 만에 잊었겠지만, 나는 아직도 그 장면을 또렷하게 기억한다. 처음 찾아온 도시에서 누군가가 건넨 미묘한 친절이 마치 환영의 손짓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이런 스침의 순간들은 처음부터 작별이 예정되어 있다. 다시 볼 일 없다는 걸 서로 알고 있다. 그래서 더 가볍고, 그래서 더 아름답다. 관계의 부담도 없고, 기대도 없고, 깊은 설명도 필요 없다. 그저 한 장면을 공유했다가 자연스럽게 흩어진다. 그런데 그 가벼움 속에서 유독 진심이 느껴지는 순간이 있다.

여행이 주는 진짜 선물은 종종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라 바로 이런 사람들 덕분에 만들어진 감정이다. 여행의 초입이나 말미에 스쳐 지나간 얼굴들이 오히려 도시의 기억을 완성해준다. 여행이 끝나고 나면 풍경보다도 이런 순간이 더 오래 떠오르곤 한다. 그래서 나는 이런 장면들을 소중히 여긴다. 한 번만 만났지만 분명히 내 여행을 따뜻하게 밝혀주었던 사람들. 그들은 다시 등장하지 않지만, 그 순간들은 내 안에서 오래도록 살아남는다.

 

 

짧은 인연이 남기는 여운


여행에서 돌아온 뒤에 가끔 이런 생각이 든다. 왜 나는 풍경보다 사람을 더 오래 기억할까. 왜 다시 볼 가능성이 없는 사람들의 얼굴이 희미하게 남아 있을까. 그리고 왜 그들의 행동이나 작은 말투 하나하나가 여행의 중요한 장면처럼 떠오를까.

스위스의 작은 마을에서 길을 헤매던 일이 있었다. 지도도 GPS도 제대로 잡히지 않아 계속 엉뚱한 곳으로만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었다. 결국 모퉁이에 서 있던 노부부에게 길을 물었고, 그들은 손짓과 눈짓으로 길을 천천히 설명해줬다. 몇 걸음 걸었다가 다시 돌아와 이쪽으로 꺾어야 한다는 말까지 덧붙여줬다. 그 순간의 공기와 친절이 아직도 생생하다. 몇 분 남짓의 짧은 인연이었지만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았다.

이런 만남에는 공통점이 있다. 계산이 없다. 시간을 많이 쓰지 않는다. 부담이 없다. 하지만 순간의 진심은 크다. 이 관계는 잠깐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순수하다. 서둘러 사라지기 때문에 더 깊게 새겨진다. 여행자는 그 순간의 따뜻함을 받으며 마음속의 긴장을 풀고, 상대는 자신이 사는 도시를 찾은 누군가에게 작은 선의를 건넨다. 그 짧은 교류가 여행 전체를 바꿔놓기도 한다.

여행 후에도 이런 사람들이 가끔 떠오른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 텐데도 말이다. 그들이 지금도 같은 자리에 있을지, 여전히 누군가의 여행을 돕고 있을지, 가끔 궁금해진다. 관계의 시간은 짧았지만 감정의 밀도는 높았기 때문이다.

여행 중 나누는 이런 인연들은 일상에서 만나는 관계와는 다르다. 일상에서는 관계가 시간이 쌓이면서 서사가 만들어지고, 그 서사 속에 감정이 담긴다. 하지만 여행 중 만나는 사람들과는 서사가 없다. 오직 순간과 감정만 존재한다. 그래서 순간의 선명함이 더 오래 기억되는 것 같다.

이 짧은 만남들은 여행의 여운을 길게 늘려준다. 마음속에 작은 흔적을 남기고, 나는 그 흔적이 좋다. 가벼운 인사 한마디가, 장바구니를 양보한 행동 하나가, 길을 알려준 손짓이, 여행을 끝까지 따뜻하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나는 이런 작은 인연들을 잊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단 한 번 등장한 인물이지만, 여행을 완성하는 중요한 조연이었으니까.

 

 

왜 우리는 평생 다시 만나지 않을 사람들을 기억하는가


여행을 오래 할수록 확신하게 되는 것이 있다. 여행 중 스쳐간 사람들은 다시 등장하지 않을 인연이지만, 그 순간들은 오래 남는다. 왜 그럴까. 아마도 인간은 예정된 작별에 마음이 끌리는 존재라서 그런 것 같다. 다시 만날 가능성이 없다는 사실이 순간의 감정을 더 빛나게 만든다.

우리가 기억하는 것은 결국 그 사람보다는 그 순간에 느낀 감정이다. 감정이 특별했기 때문에 표정, 분위기, 손짓, 움직임이 함께 기억 속에 각인된다. 여행에서는 모든 감각이 평소보다 더 예민해져 있다. 낯선 환경에서 만나는 작은 친절, 우연한 미소, 인사 한마디가 훨씬 강하게 마음에 들어온다. 그래서 짧은 순간들이 오래 남게 된다.

또 여행 중의 만남에는 서사가 없다. 과거도 모르고, 미래도 모르고, 지금 이 순간만 공유한다. 설명이 필요 없고, 해석도 필요 없다. 그래서 순간 자체의 감정만 남는다. 이 감정은 이야기 없이도 마음에 오래 머문다.

이 기억들은 결국 나를 조금씩 변화시킨다. 여행에서 받은 따뜻함은 형태를 바꿔 다른 사람에게 흘러간다. 누군가의 친절을 받은 경험이 나도 모르게 다른 누군가에게 더 부드럽게 행동하게 만든다. 여행은 결국 나 자신을 조금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드는 과정이고, 그 변화에는 늘 한 번만 만난 사람들의 영향이 숨어 있다.

우리는 평생 다시 만나지 않을 사람들을 기억한다. 이름조차 모르는 얼굴들이지만, 그들은 분명히 내 여행을 빛나게 만들었다. 그들은 다시 등장하지 않지만, 그 순간의 감정은 계속 살아 있다. 그래서 나는 앞으로도 이런 순간들을 기록할 것이다. 여행은 결국 사람에 대한 기록이기도 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