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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의 순간들

길을 잃은 순간, 기록하는 여행기 - 여행 후 마음의 변화

by birdi 2025. 12. 9.

작은 계곡의 풍경, 나무가 울창하고 물이 흐르고 있다. 시원해보인다.
무작정 걷다가 찍어본 사진, 일본 쿄토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데까지 걸린 시간


 여행을 하다 보면 누구나 한 번쯤은 길을 잃는다. 그런데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 길 잃음 자체를 좋아하게 되었다. 정확히는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깨닫는 그 아주 서늘하면서도 신기한 순간을 좋아하게 되었다. 목적지가 희미해지고, 지도가 낯설게 보이고, 발걸음이 헷갈리기 시작하는 그때. 어쩌면 그 순간이야말로 여행에서 가장 온전하게 내가 나로 존재하는 시간인지도 모른다.

 보통의 여행에서는 계획이 중요하다. 어느 방향으로 갈지, 어떤 교통편을 이용할지, 어디에 들를지 모든 것을 미리 정해두곤 한다. 하지만 길을 잃는 순간에는 계획이 무의미해진다. 내가 설계한 모든 루트가 엉켜버리고, 방향 감각마저 흔들린다. 처음에는 당황이 찾아온다. 내가 어디에 있는지, 목적지는 어느 방향인지, 도대체 무엇을 잘못 선택한 건지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길을 잃고 몇 분이 지나면 마음속이 조용해진다. 목적지를 향해 빠르게 움직여야 한다는 압박이 사라지고, 다음 장면이 무엇일지 모른다는 호기심이 서서히 자리를 잡는다. 바로 그 순간, 나는 비로소 여행을 하고 있다는 실감을 느낀다. 계획된 동선을 따라가고 있을 때보다 훨씬 선명하게 살아 있다는 느낌. 내가 예상하지 못했던 공간과 마주할 때 마음속이 넓어지는 경험. 길을 잃는 순간마다 도시가 조금 더 깊게 나에게 스며든다.

스위스의 어떤 마을에서는 의도치 않게 작은 골목에 들어섰다가 완전히 낯선 풍경 속으로 들어간 적이 있었다. 지도는 계속 로딩만 하고 있었고, 사람도 거의 없는 동네였다. 그런데 그곳에 서 있는 순간, 희한하게도 초조함보다 평온함이 찾아왔다. 바람이 불고, 언덕 위 집들 사이로 햇빛이 내려오고, 아무도 나를 모르는 공간 속에서 나는 그저 한 사람의 여행자가 되어 있었다.

 길을 잃은 순간은 도시에 대한 강요를 없애준다. 유명 장소를 가야 한다는 의무도, 누군가에게 설명해야 한다는 부담도 사라진다. 길을 잃어버리면 선택지는 단순해진다. 앞으로 가거나, 뒤로 돌아가거나, 아니면 잠시 멈춰 서 있거나. 삶이 이렇게 단순해지는 순간이 또 있을까. 나는 그 단순함 속에서 마음이 자유로워지는 것을 느낀다. 목적지보다 오늘의 공기가 더 중요해지는 순간. 나는 그 순간을 잊지 않으려고 한다. 그래서 길을 잃는 경험을 여행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그 순간마다 내가 조금 더 부드러워지고, 조금 더 겸손해지고, 조금 더 이 도시에 가까워지는 것 같다.

 

지도가 무용지물이 된 순간, 도시와 진짜 대화를 시작한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결국 지도가 나를 도와줄 수 없는 순간이 온다는 뜻이다. 화면을 확대하면 할수록 길이 더 복잡하게 느껴지고, 내가 어디 있는지 확인하려고 서성일수록 더 멀어진다. 그리고 어느 지점에 이르면 나는 결국 이렇게 결론 내린다. 이 지도는 오늘의 나를 이끌어줄 수 없구나. 그때부터 시작되는 것은 도시와의 직접적인 대화다.

 지도를 계속 바라보면 익숙한 방식으로만 도시를 이해하게 된다. 이미 누군가가 정해놓은 도로,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길, 유명한 장소까지 이어지는 동선. 하지만 길을 잃은 순간부터 나는 도시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게 된다. 이 골목은 왜 이렇게 조용할까, 이 집들은 왜 이렇게 낮은 층을 유지하고 있을까, 이 거리는 왜 누구도 걷지 않을까. 지도는 알려주지 않는 도시의 결을 눈으로 직접 읽기 시작한다.

 상하이의 어느 오래된 주택가에서 길을 잃었을 때가 있었다. 원래 목적지는 붐비는 관광지였지만, 어느 순간 이상한 방향으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지도를 확인해도 방향은 계속 어긋났다. 결국 나는 지도를 포기하고, 그냥 이 동네가 보여주는 순서대로 걷기 시작했다. 오래된 건물들의 색, 골목 사이로 널린 빨래, 가끔 들려오는 자전거 소리. 예상하지 못한 풍경들이 늘어져 있었고, 그 풍경을 보는 동안 속도가 자연스레 느려졌다.

 나는 관찰자가 되어 그 공간과 오롯이 대화를 나누었다. 길을 잃지 않았다면 결코 마주하지 못했을 장면들이었다. 유명한 식당도 아니고, 관광 지도에는 절대 나오지 않을 장소였지만 그곳의 공기는 도시의 진짜 얼굴 같았다. 이런 순간들이 쌓이면 여행의 밀도가 달라진다. 정보로 움직이는 여행에서 감각으로 움직이는 여행으로 바뀌는 것이다.

길을 잃을 때마다 느끼는 또 하나의 특별한 감정이 있다. 도시가 나에게 새로운 길을 제안하는 느낌. 내가 가려던 길이 아니었지만, 도시가 보여주고 싶은 장면이 숨겨져 있었다는 듯. 그래서 나는 이제 길을 잃어도 당황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순간을 기다릴 때도 있다. 지도 대신 도시에게 길을 묻는 방식. 그 순간이야말로 진짜 여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길을 잃고 나서야 발견하는 도시의 온도와 나의 속도


 길을 잃은 순간을 떠올리면 늘 같은 감정이 따라온다. 내가 예상하지 못한 길에 서 있을 때, 마음이 조금 더 느려지고 부드러워지는 느낌이다. 목적지를 잃어버린 순간부터 나는 자연스럽게 나만의 속도로 걷기 시작한다. 누군가가 만들어놓은 여행 루트에서 벗어나 도시가 만들어주는 리듬을 따라가게 된다. 이때 느껴지는 감정은 설명하기 어려울 만큼 고요하고도 자유롭다.

스스로 선택한 길이 아닌, 도시가 나를 데리고 간 길을 걷다 보면 새로운 시선이 생긴다. 사람들의 표정이 다르게 보이고, 건물의 색이 선명하게 다가오고,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 노인의 모습 하나도 특별해진다. 길을 잃지 않았다면 그냥 스쳐 지나갔을 장면들이지만, 길을 잃는 순간부터 모든 장면에 감정이 스며든다. 그 시간 동안 나는 도시의 중심이 아니라 변두리에 서 있는 사람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그 변두리의 감정이 오히려 여행을 더 깊고 넓게 만든다.

 길을 잃고 걷다 보면 결국 익숙한 장소로 돌아오곤 한다. 처음에는 불안했지만 돌아와 보면 오히려 그 길 덕분에 도시를 더 잘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길을 잃지 않았다면 알 수 없었던 거리의 흐름, 사람들의 움직임, 풍경의 결을 배운 셈이다. 목적지를 제대로 향해 가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얻게 되는 경험이다.

 나는 이런 길 잃음의 경험이 삶과도 닮아 있다고 생각한다. 계획대로 가지 않는 순간이 찾아왔을 때, 예상하지 않은 방향으로 걸어가게 되었을 때, 그 길이 나에게 어떤 풍경을 보여줄지 아무도 모른다. 하지만 그 길이 끝났을 때 돌아보면, 늘 무언가 새로운 것을 발견하게 된다. 도시에서 길을 잃은 순간처럼 삶에서도 길을 잃는 순간은 결국 나를 더 넓은 곳으로 데리고 간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방향을 잃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방향을 허락받는 것이다. 그리고 여행에서 느낀 그 감정은 오래도록 마음속에 남아 있다. 나는 앞으로도 이렇게 길을 잃는 순간을 여행의 일부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 순간마다 도시의 온도와 나의 속도가 자연스럽게 맞아떨어지는 경험을 할 수 있으니까.

 

 

 

2025.12.09 - [작별의 순간들] - 마지막 인사에서 발견한 따뜻함 - 여행이 남긴 여운에 대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