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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별의 순간들

끝났다고 생각한 순간에야 찾아오는 잔향 – 여행 후에 찾아오는 감정들

by birdi 2025. 12. 9.

 

뮈렌 마을 꼭대기에서 바라본 풍경, 푸른 잔디가 펼처져 있고 스위스 전통 가옥인 샬레형 집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스위스 뮈렌, 위에서 내려다 본 마을 풍경



여행이 끝났다고 말하는 순간, 우리는 모든 감정이 일시에 사라질 것처럼 생각한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여행의 잔향은 여행이 끝난 뒤 오히려 더 커진다. 공항에서 짐을 찾을 때, 지하철을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샤워를 끝내고 침대에 누운 순간… 마음 속 깊은 곳에서 여행의 소리가 조용히 울린다. 마치 끝났다고 말하는 그 순간부터 도시가 마지막 인사를 보낸 듯한 잔향이다.
이 글은 여행이 끝난 뒤에야 들리는 그 잔향, 여행의 여운이 우리에게 어떤 마음을 남기는지에 대한 이야기다.
 
 
 

사라져도 계속 들려오는 도시의 소리


물리적으로는 이미 도시는 멀어졌다. 분명히 비행기를 타고 떠나왔고, 스마트폰 속 지도에서도 그 도시는 손가락으로 축소해야 보일 만큼 멀어져 있다. 그런데도 그 도시의 소리가 마음속에서 계속 울린다.
아침마다 들리던 트램 소리, 숙소 창가에서 들리던 빗방울, 시장에서 흘러나오던 활기찬 목소리들. 우리가 있을 때는 그냥 배경음처럼 들리던 것들이 떠나온 뒤에는 갑자기 주연처럼 떠오른다.
도시의 소리가 잔향으로 남는 이유는, 그 소리들이 그 도시에 대한 ‘감정의 기억’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소리를 들을 때 내가 어떤 감정이었는지, 어떤 표정을 하고 있었는지가 함께 저장된다. 그래서 여행이 끝난 뒤에는 감정이 먼저 떠오르고, 그 감정이 소리를 깨워 다시 울리게 만드는 것이다.
어떤 날은 출근길 지하철에서 불현듯 그 도시의 새벽 냄새가 기억되어 갑자기 마음이 촉촉해지기도 한다. 여행이 끝난 줄 알았는데, 도시의 소리들은 끝나지 않고 계속 마음을 두드린다.
여행은 떠나왔어도, 내 안의 감정은 아직 그 도시에 머물러 있는 것처럼.

 
 

떠났기에 더 선명해지는 순간들


여행 중에는 눈앞에 펼쳐지는 수많은 장면을 정신없이 기록하느라, 정작 마음속에서는 기록할 여유가 없다. 하지만 떠나오고 나면, 그 순간들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내가 걸어간 길, 내가 머문 카페, 내가 바라보던 강의 흐름. 그때는 몰랐던 따뜻함이 시간이 지난 뒤에 온기로 되살아난다.
여행의 온기는 사진보다 느리게 도착한다.
사진 속 장면은 즉시 확인할 수 있지만,
그 장면이 내 안에서 어떤 의미로 빛나는지는 시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여행 후 며칠이 지나면 갑자기 순간의 온기가 찾아온다.
어느 날은 뜨거운 라테를 들고 호텔 로비에 앉아 쉬던 그 편안함이 떠오르고,
어느 날은 노을 지던 강가에서 느꼈던 고요함이 마음을 가볍게 지나간다.
떠났기 때문에, 우리는 그 온기를 더 정확히 느낀다.
그 순간 안에서는 놓쳤던 감정이,
어떤 날은 위로로, 어떤 날은 그리움으로 찾아온다.
이 온기는 사라진 장면을 다시 불러오고,
그 장면은 또 다른 나를 만들어 준다.
여행의 온기는 결국 우리의 삶 속에서 오래도록 머문다.
하루가 지칠 때, 마음이 텅 빈 날,
그 온기는 나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작은 기억의 난로가 된다.

 
 

잔향 속에서 다시 마주하게 되는 나


여행의 잔향이 들리는 순간, 우리는 단순히 도시를 떠올리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있었던 ‘여행 중의 나’를 떠올리게 된다. 일상에서와는 조금 다른 속도로 걷고, 다른 표정으로 웃고, 조금 더 솔직하고 느긋했던 나. 여행은 장소를 바꾸는 경험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나를 바꾸는 경험이기도 했다.
잔향 속에서 우리는 묻게 된다.
그때의 나는 왜 그렇게 기분이 좋았을까?
왜 그곳에서는 숨이 더 편안했을까?
어떤 순간에서 나는 더 나다운 모습을 보여줬을까?
이 질문들은 잔향이 만들어내는 내면의 울림이다.
그리고 그 울림은 우리에게 조용한 결론을 준다.
여행이 좋았던 이유는 도시가 아닌 ‘그곳의 나’였다는 것.
조금 더 부드럽고, 덜 경계하며, 자유롭게 움직이던 나.
이 잔향은 끝난 여행을 계속 이어주는 힘이 된다.
그때의 나를 다시 만나고 싶어서 또 다른 여행을 계획하게 되고,
그 도시를 떠올리며 지금의 나를 돌아보기도 한다.
여행이 끝난 후에도 마음속에서 계속 울리는 소리가 있다면,
그건 아마도 우리가 아직 그 여행을 완전히 떠나오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여행은 그렇게, 잔향으로 오래 남으며 우리를 성장시킨다.

 

2025.12.09 - [작별의 순간들] - 사라짐이 남겨놓은 자리에서 – 떠난 여행지가 남긴 빈자리